김광섭 시집 동경(憧憬)(1938)
** 김광섭(金珖燮)(1905~1977) 시선 한국현대시문학대계 12(1981 지식산업사)에서 발췌**
고독(孤獨)
내
하나의 생존자(生存者)로 태여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칸(間)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氣流)의 파동(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 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성(性)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世界)의 단편(斷片)은 아즐타.
오랜 세기(世紀)의 지층(知層)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신경(神經)도 없는 밤
시계(時計)야 기이(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 시인은 주검처럼 뭔가 소외(疏外)됨과 절망(絶望)의 절박(切迫)한 심정(心情)에 처해 있다. 그것이 그만의 고독(孤獨)이라 여겨진다. 태어남과 죽음 모두 고독과 함께 오고간다.
죽음을 전제로 한 태어남이기에 죽어서 땅 속에 누워있는 주검의 이야기를 시인은 먼저 꺼낸다. 그리고 주검의 거처인 무덤과 그 죽음 너머의 무한한 떨림이란 미지(未知)의 느낌과 바다 심연(深淵)의 묵중(默重)한 바위 아래 ‘고단한 고기’와 같은 버림받음과 무력감(無力感)만 남아 있다, 고독(孤獨)에 대한 시인의 자각(自覺)을 드러낸다. 그 소외와 절망의 고독에서는 인간의 심성이 순수한 인간성이나 아름다운 꿈에 닿지 못한 채 단지 그리워하고 소망(所望)하기만 하던 세상의 작은 사랑의 조각마저도 우리에게서 아련히 멀다고 시인은 느낀다. 그러한 고독의 바다의 심연에서는 태초(太初)부터 야만성(野蠻性)과 자기보존성(自己保存性)으로 가득한 인류 문명의 역사에 대한 본능적(本能的)이고 방어적(防禦的)인 지적(知的) 인식(認識)과 자각(自覺)에 무력하게 이끌려 갈 뿐이다. 즉 인류 문명사(文明史)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지성의 무력함고 위선이라는 부조리이다. 지적(知的)이든 감성적(感性的)이든 간에 자각(自覺)조차 할 수 없이 잠에 빠져버린 어둠의 시대(時代)에도 시간(時間)은 기이(奇異)하게도 계속해서 흘러가니 혹시 시계(時計)마저 잠이 든다면 그 시간의 흐름이 멈춰질까? 시계(時計)를 잠시 멈췄다 다시 가게 한다면, 희망과 기쁨과 행복과 사랑이 박탈(剝奪)된 소외와 절망을 품고 흐르는 고독과 야만성의 부조리한 인류 역사가 멈춰지고 다시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독백(獨白)
피로(疲勞)한 생활(生活)의 윤리(倫理)에서
묵중(默重)한 머리를 들어보나
원래(元來) 목표(目標) 있는 우수(憂愁)도 아니요
말하여 진(盡)할 비애(悲哀)도 아니려니와
또한 어데서 비롯하야
어데서 끝날 얘기랴.
흐르고 쌓여 나려온
온갖 울분(鬱憤)을 다하여서도
결국(結局)은 돌멩이 하나 움직이지 못할
허망(虛妄)한 사념(思念)에 다다를 뿐
드디어 불행(不幸)을 거느리고
고독(孤獨)의 삼림(森林)에 들다.
** 앞의 시 ‘고독’에서 드러낸 소외와 절망으로 가득한 시인의 암울(暗鬱)한 심성이 이 시 ‘독백(獨白)’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로서 그가 위치한 시공(時空)에서 머물고 맴돌 뿐이다. 소외감, 절망감, 무력감 그리고 죽음 이후의 미지에 대한 두려움, 인간과 인류 역사에 대한 꿈과 소망마저 깊은 잠에 들어서 결코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독하고 부조리하고 암담한 상황을 다시금 자기 자신에게 슬프게 들려주고 있다.
그가 어느 시기 어떤 장소에 있으면서 ‘고독’이란 시와 이 ‘독백’이란 시를 썼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일제 강점기와 이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란 인류의 야만성이 폭발하는 시대를 살았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가 그 시대의 삶에서 느끼는 우수와 비애는 시작과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목적도 없고 위로의 말로써 사라질 심정이 전혀 아니라고 시인은 짐작한다. 그 심정은 허무와 소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 특유의 허무와 소외와 무력감에서 벗어나야만 그 음울한 심정이 사라질 수 있을 텐데 시인에게는 그 비상구(非常口)가 없어 보인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과 그로 이루어진 위대한 문명의 연약함과 무력함이란 이중성과 그에 대칭되는 야만성과 폭력성이란 부조리는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인류의 문명사는 야만과 파괴와 재건과 복구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을 뿐이지 대철학자 칸트의 이성과 고대철학의 지성과 이데아 등은 그러한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이란 잠재된 반생명성(反生命性)의 결말을 막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못되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철학과 종교는, 그 대량 학살과 무차별적인 파괴와 붕괴의 결과를 인간이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면서 양심(良心)을 회복하는 정도에서 약간의 도움이 되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반복하여 재발되는 야만성의 인류 역사에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돌멩이 하나 움직이지 못할 허망(虛妄)한 사념(思念)에 다다를 뿐’이라는 부조리(不條理) 속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절망적으로 위로한다. 고대로부터 철학자들로 시작해서 현대의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행복의 정의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서 진력을 다해왔다. 하지만 어떤 철학의 지성이나 관념이나 이론이나 대철학자 칸트의 이성조차도 행복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하지 못했으며 인류의 삶은 ‘불행(不幸)을 거느리고 고독(孤獨)의 삼림(森林)에 들’뿐이라고 시인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인류문명의 발달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듯했지만 결국 문명이 발달할수록 양차대전과 거대한 사회 속에서의 인간소외와 같은 파괴적이고 불행한 일들만 일어났다. 상호간에 파멸적인 전쟁과 분쟁들로 인한 불행만이 아니라 문명의 주인인 인간이 문명으로부터 소외되어 고독해지는 부조리가 나타났고 그것을 시대의 현자들이 지적하고 그 부조리로부터 해방되려고 인간의 심정의 심연에서 비롯하는 ‘고독과 소외의 삼림’을 헤치고 벗어나고자 부심하였다. 그 삼림이 시인의 자조적인 통찰로는 ‘허망(虛妄)한 사념(思念)’이었다.
허망한 사념과 고정관념을 해체하자는 철학적인 움직임과 그와 밀접히 관련된 양자물리학이론의 과학철학과 정보과학이론이, 피로와 우수와 비애와 울분으로 가득한 묵중한 인류의 머리를 가볍게 해주고 진선미(眞善美)로 충만한 (잃었던) 행복을 찾으려는 최선의 방법을 인류가 택하게 할 수 있을까? 원수 되었던 이웃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고 수용하면서 사랑의 행동을 서로가 나누게 할 수 있을까? 그 시대의 시인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말이다.
소곡(小谷)에서
수리개가 여회(旅回)하는 정밀(靜謐) 한 오후(午後)
이 소곡(小谷)에는
새의 노래도 한 떨기 꽃도 없이
녹음(綠陰)이 깃들고 있나니
원(願)하여 애(愛)의 성(性)을 그려보거늘
오늘도 마음은
둔(鈍)한 벌레가 되야 외로히 풀잎에 기다
** 풍요로운 문명사회와 활기차고 아름다운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자 또는 어떤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핍박으로 인해서 자유를 박탈당한 자의 무력감과 고독을 이 ‘소곡(小谷)에서’라는 시를 통해서 시인은 드러내고 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을 수 있는 맹금류 솔개처럼 특정한 자유인 혹은 정복자만이 여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안한 어떤 세상의 후기 시대가 배경이다. 그 시대의 이름 없는 작은 계곡처럼 미상(未詳)의 고립된 장소에는 기쁨과 아름다움이 없는 그늘진 생명만이 들어서 있다. 그 작은 계곡에 갇혀서 살아야만 하는 시인이 사랑의 심성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소원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풀잎에서 기는 우둔한 벌레처럼 무력하고 고독한 처지에 그치고 만다. 소망과 낙망이 교차하며 뒤섞이는 시대의 소곡(小谷), 인생의 소곡(小谷).
동경(憧憬)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 사화(詞華) **
한국고전용어사전 : 시문(詩文)의 수사(修辭). 혹은 훌륭한 시문을 이름.
한시어사전 : 뛰어난 시문(詩文). 아름답게 꾸며진 말. 글재주. 사조(詞藻)
** 아름답게 꾸며진 뛰어난 시문(詩文)들이 말 없는 고아(孤兒)처럼 고립(孤立)되고 소외(疏外)되어서 시인에게는 단지 꿈과 슬픔이 될 뿐이다. 왜 그런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시인이 알려주지 않는다. 시인은 어떤 진실한 기쁨과 아름다운 시어(詩語)들로 빚어진 진선미(眞善美)의 훌륭한 시상(詩想)의 사화(詞華)를 꿈꾼다. 동시에 시인은, 그의 사화(詞華)를 향한 벅찬 심정(心情)의 물결이 생명의 물길을 자유롭게 찾아서 흐르지 못하고 낙망(落望)과 무기력(無氣力)의 깊은 웅덩이에 갇혀 버린 채 생명력(生命力)이 메말라 가는 고립과 소외의 슬픔을 경험한다.
하지만 시인은 뭔가로 부터 소명(召命)을 받아서 그 뭔가로 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그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 별이 비추는 희망의 빛조차 떨어져 버린 낙망의 밤에 어디에선가 불어온 바람이 사화(詞華)을 찾아 가는 길로 시인을 인도(引導)한다. 그 바람은, 세상 마지막 날에 어떤 새로운 우주(宇宙)에서 오는 해체(解體)와 재창조(再創造)의 바람(風)인가 혹은 오래되어 낡고 타락해버린 인간 본성(本性)으로부터 불어온 부패(腐敗)와 멸망(滅亡)으로 향하는 바람(風)인가 아니면 ‘별조차 떨어진’ 어두운 밤하늘로부터 깊이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려고 불어오는 한 줄기 빛과 동행하는 바람(風)인가?
떨어진 별처럼 움직이지 않는 낙망(落望)과 음울(陰鬱)함으로 가득한 그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시인의 ‘만상(萬象)’에 더해진다. 그 형상(形象)은 무엇일까? 뭔가 동경(憧憬)할만한 명확한 희망일까? 자유와 기쁨과 행복으로 가는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시인이 박탈당한 후 꿈과 슬픔만 남은 사화(詞華)가 아닌 그 잠든 시어(詩語)와 시상(詩想)의 껍데기를 해체하고 드러난 속살까지도 초월(超越)하여 새로운 생명(生命)의 시(詩)로 거듭나도록 시인의 영혼(靈魂)이 동경(憧憬)하는 그 무엇일까?
공막(空寞)
비애(悲哀)의 언어(言語)를 쫓아내고
신념(信念)의 중세(中世)를 쫓아내고
시대(時代)의 고민(苦悶)을 쫓아낸 뒤
나의 체중(體重)이 경기구(輕氣球)가 되어 난다.
나의 미래(未來)가 경쾌(輕快)하게 상승(上昇)한다.
그 다음엔 관모(冠毛)같이 나는 하늘 지경에 가서 운다.
** 시 제목 ‘空寞’은 ‘헛되고 비어서 쓸쓸하다’는 뜻이다. 지성과 이성과 논리를 선호하는 고지식한 뇌로부터 전해진 무겁기만 한 언어와 신념과 고민을 비우고 가벼워진 시인의 몸(體重)이 저절로 하늘로 떠오른다. 그와 함께 그의 미래와 희망이 경쾌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끝도 목표도 없이 그저 떠오른 시인의 몸과 마음은, 헛된 깃털의 새처럼 이유와 목적을 모르고 도착한 하늘 경계에서 무엇이 애통하여서인지 울고 만다. 미래도 희망도 새의 깃털처럼 떠올랐지만 또한 정처 없이 떠돌다 어느 미지의 땅에 떨어져버릴 지 아니면 하늘 지경을 넘어설지 결정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한다. 비우고 가벼워진 체중(體重)의 몸과 마음이 생명까지 비우고 영원한 잠에 든 것은 아닐까? 사유(思惟)라는 마음의 강력한 고정관념은 해체되어야만 하겠지만, 몸과 함께 하는 생명과 자유와 사랑까지 해체되지는 않았을 터이니 하늘 지경에서 천지(天地)를 다 바라보면서 애통(哀痛)해 하는 울음이란 허무한 인생에 대한 연민(憐愍)인가 회한(悔恨)인가? 그렇다면 하늘 지경까지 떠오를 수 있었던 가벼운 마음과 몸이 헛되게 비워진 것은 아닐까? 공막과 허무(虛無).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4절) 시인의 그 허무와 공막을 누가 위로할 것인가?
*공막 空寞 : 헛되고 비어서 쓸쓸함*
*관모 – 갓털; 식물의 씨방의 맨 끝에 붙은 솜털 같은 것, 새의 머리에 길고 더부룩하게 난 털; 그런 털을 가진 새.*
비 개인 여름 아츰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나려와서
여름 아츰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야
금붕어가 시를 쓴다.
** 이 시로부터는 마치 장자(莊子)와 노자(老子)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빌려서 시(詩)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김광섭 시인의 시상(詩想)은 노자 장자에서 간단히 끝나지 않아 보인다. 이 시도 시집 ≪동경(憧憬)≫(1938)에 수록된 시이다. 그 압제 시절의 흐리고 비오는 우중충한 일상 속에서도 비 개인 맑은 하늘과 같은 희망과 기쁨이 잠깐 동안이나마 사방이 막힌 못 같은 답답한 삶 속에 깃든다. 오랜 장마 후의 여름 아침 푸른 하늘의 상쾌한 공기로부터 오는 활기(活氣)로 인해서 못에 비친 짙은 생명력에 흠뻑 젖은 녹음(綠陰)을 배경으로 하여 못물 속 팔딱이며 헤엄치는 금붕어의 여운(餘韻)이 마치 한편의 시 같다고 시인은 느낀다. 자신이 그 금붕어처럼 시를 쓰고 있다는 떨리는 공감으로 자연과 시인이 하나가 된다. 그 작은 공명(共鳴)을 하나 둘 쌓아가면서 못이 대양처럼 확장되어 푸른 쾌청한 하늘을 바라보고 한껏 숨 쉬며 생명과 사랑의 시를 쓸 수 있기를 시인은 잠잠히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것만 같다.